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.21 사태 (문단 편집) == 발단 == 1965년 [[한일기본조약]]으로 인해 [[한미일관계|한, 미, 일 동맹체제]]가 구축되었고 북한은 고립되는 형국이었다.[* 당시 [[니키타 흐루쇼프|흐루쇼프]]의 [[소련]]이 서방과 화해를 모색하는 평화공존론을 주장하자 [[중국]]과 북한이 소련을 비판하고 이후 중국과 소련은 1962년 [[중소결렬]]로 인해 서로 틀어진 데다 얼마 뒤 중국은 1966년 [[문화대혁명]]으로 북한 체제를 비판했고 이에 따라 북한도 중국에게 반발을 하는 바람에 동아시아 쪽 사회주의 삼국의 동맹 관계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상황이었다.] 특히 [[베트남 전쟁]]이 한창 진행 중이던 가운데 파병된 한국군의 전투력에 고전하던 같은 [[사회주의]] 국가인 북베트남의 [[호찌민]]이 [[김일성]]에게도 파병을 요청했지만 앞서 언급한 상황 때문에 김일성은 거절했고 남한이 더 이상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하지 못하게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.[* 후일 기밀문서를 통해 드러난 사실은 북한이 직접 파병은 하지 않았지만 공군 조종사들을 비밀리에 보내 베트남 군복을 입혀 작전에 내보냈다는 것이다.] 그 약속에 따라 1968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김일성이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한국을 향한 강도 높은 안보도발을 시작했고 그 시작으로 청와대 침투 계획, 즉 1.21 사태를 주도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